무해함에 대하여
‘무해함’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말이다. 본래 사물에 주로 쓰인 말인데, 7~8년 전부터 갑자기 괜찮은 사람 또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18년에 나온 최은영의 소설집 제목 ‘내게 무해한 사람’이 사회적 확산의 계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마음 놓을 사이, 다정한 사람에 대한 갈망은 표독하고 인정머리 없고 잔혹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의 심리적 메아리이다.
『여자 주인공들』(생각의힘, 2024)에서 오자은 덕성여대 교수는 무해함을 “나에게 도움은 못 되어도, 적어도 해는 안 끼치는, 상처는 안 주는, 관계의 최저선”이라고 말한다. 이 말엔 “성폭력, 데이트 폭력, 스토킹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범죄 속에서 자기보존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현대 한국 여성들의 기대가 감추어져 있다.
이 책은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여성들의 마음을 사회적 변화와 나란히 조망한다. 박완서, 김향숙, 은희경, 최은영 등의 작품을 물감 삼아 “현대 한국 여성의 삶과 마음, 운명이 걸어온 역사”를 붓질해 그려낸다. 박완서의 작품에서 ‘K-장녀의 성장 서사’를 끄집어내고, 김향숙의 작품에서 1980년대 ‘중산층 가정의 데모하는 딸들’의 마음을 발굴하는 등 저자의 붓 놀림은 대담하고 활달하다. 무해함은 근대화의 폭풍과 가부장제의 폭압 속에서 성장한 한국 여성들의 영성이 마침내 가 닿은 자리다. 이는 약하고 무력한 여성들이 우정과 사랑에서 힘을 얻으려는 마음의 안간힘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무해한 사람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맞닿을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생채기들을 최소화하고 타인 앞에 몸을 한껏 웅크릴 줄” 안다. 다른 말로, 이러한 웅크림을 배려라고 한다. 나보다 먼저 너를 생각하는 겸허한 마음과 세심한 행동은 가뜩이나 상처받기 쉬운 인간관계에서 증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대신 응원과 위안을 늘리고 돌봄과 연대를 증진한다.
‘무해함’엔 인간에 대한 최소 믿음, 즉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상처 주지 않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존재 변화의 의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는 공동체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전적인 이타성과 자기희생은 신과 같은 강자들만 가능하나, 서로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 배려를 더하며 살아가는 건 약자들도 가능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여전히 지독히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아마도 이런 끈질기게 착한 마음들일 것이다. 힘들 때 들은 친절한 한마디가 평생 마음에 메아리치듯, “한 번 스쳐 간 자리에 남은 온기”가 인간을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