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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馮夢龍) - 명나라 최후의 명편집자

편집마왕 2025. 6. 2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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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 중국 소주(蘇州)에서 태어나서 명나라 말기 강남 출판계에서 활약한 인기 작가 겸 편집자이다. 삼언(三言), 즉 『유세명언(喻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을 비롯해 숱한 베스트셀러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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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은 10대 때부터 과거에 응시했으나 수없이 낙방한 끝에 57세에 이르러서야 비상한(?) 수법으로 관직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수험 공부엔 재주가 모자랐으나, 편집자로서 재능은 눈부셨다. 신참 편집자 시절에 그는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 일을 겸했다. 이때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려 편집해 간행한 과거 수험서가 『인경지월(麟經指月)』이다. 자신은 과거에 수십 차례 낙방했지만, 이 책은 수험생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강남 출판계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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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은 당대 문화의 변화에 민감했다. 통속적으로 여겨 지식인들이 경멸하고 멀리해 온 백화 소설 및 희곡이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걸 감지하고,  백화 장편 소설인 『수호전』을 세밀하게 교정하고 문장을 다듬은 후 호화 장정본으로 출판해 큰 성공을 거두는 등 편집자로 승승장구했다. 세간에 떠도는 야한 노래를 모은 민요집 『괘지아(掛枝兒)』와  도박 교과서 『엽자신투보(葉子新鬪譜)』 등을 펴내서 인기를 얻는 바람에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현청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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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풍몽룡의 진가는 소설 편집과 문학 창작이었다. 오랜 기간 갈고닦은 편집력을 총동원해서 삼언 등 통속 문학 작품을 잇따라 편집해 내놓음으로써, 소주 출판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로 자리 잡았다.

대표작인 삼언은 북송 이래 거리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고 먹고살았던 이야기꾼들의 강담(講談) 중 재미와 교훈을 함께 갖춘 단편 작품들을 모은 후, 자신이 새로 지은 이야기를 섞어 넣어 함께 엮은 백화체 단편소설집이다.  각 40편씩 총 120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황제, 장군, 충신, 효자, 신선, 부처, 관리, 상인, 도둑, 기생 등 수많은 인간이 나와서 온갖 주제로 이야기를 펴쳐내는 이 작품집은 풍부한 스토리, 명확한 묘사, 매끄러운 이야기 솜씨, 간결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곳곳에 반전을 감추고 있는 구성 등 풍몽룡의 넘치는 재능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비견되는 작품이다. 특히, 충효(忠孝)와 가족이라는 전통적 선비의식보다 사랑과 우정을 높이 평가해서 서민들의 세계인식을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창작 소설인 『장흥가가 진주 상인을 만나다』, 『두십랑이 화가 나서 보물 상자를 물에 던지다』 등도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로 널리 알려진 역사 장편 『신열국지(新列國志)』(100편)도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단단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숱한 영웅과 재사들이 지혜를 발휘하면서 역사적 격랑을 헤쳐 가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담아냈다. 이렇듯 그가 다시 써낸 고전 장편소설들은 이후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현재에도 거의 표준 판본처럼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중국 고전 작품 대부분이 그의 문장과 판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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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은 고금의 이야기, 소설, 민요, 희곡 등을 가려 뽑아 문장을 다듬고 표현을 정제해서 당대 독자들 취향에 맞도록 편집해서 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앞의 삼언과 함께, 당나라 때 이후로 전해오던 고전 소설들을 모으고, 자신이 쓴 작품도 슬쩍 끼워 넣은 『정사유록(情史類略)』(24권),  『지낭(智囊)』(24권, 수정보완판 28권), 『고금담개(古今譚槪)』(36권)  등은 사랑을 찬양하고, 기지를 펼쳐내고, 세태를 풍자하는 빛나는 단편들로 가득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또 풍몽룡을 전해오는 이야기를 편집하고 극화해서 연극 대본으로 고쳐 쓰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쌍웅기(雙雄記)』, 『풍류몽(風流夢)』은 그 대표작이다. 음악과 시가 어우러지기에 현대의 오페라에 해당하는 이 작품들은 입말에 가까운 뛰어난 가사, 정제되고 아름다운 선율, 단단하게 구성된 이야기 등으로 이름 높아 널리 공연되었다.  아울러 당대 소주 지방에 유행하던 민요인 오가(吳歌)를 모은 『산가(山歌) 등은 당대 민중 문학의 활력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로 평가된다.

편집과 창작을 결합한 이러한 출판 작업 덕분에 풍몽룡은 명나라 제일의 대중 문학가, 당대 중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문학 의식의 실천자라는 평가를 얻는다. 풍몽룡이 민중의 고통에 대한 강한 동정심을 품고, 유교적 가치관에 침습된 세계에 반항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개인의 자유를 찬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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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끝내 관직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61세 때 다시 비상한(?) 방법으로 복건성 수녕현 지사로 5년간 근무했다. 퇴직 후 다시 출판계에 복귀하여 칠순 때까지 편집자로 활약했다.

1644년 청나라가 쳐들어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강남 지방에 이르렀을 때, 칠순 노구를 이끌고 반청 운동에 가담했다가 1646년 일흔두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풍몽룡(1574~1646)의 초상(출처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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