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7/06

(9)
교육의 문명화 《매일경제신문》 칼럼. 이게 마지막이었는데, 어제 새로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한 해 동안 매주 읽기의 세계를 주제로 기명 칼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전 저 자신을 향해서는 할 말이 많고 세상을 향해서는 할 말이 아주 적은 사람이라 어깨가 무척 무겁네요. 교육의 문명화 “당신은 어떻게 가치 있는 인간인가?” 몇 해 전부터 학생들과 수업하는 프로젝트다. 내용은 간단하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자기 가치가 무엇인지를 각자 확인하고, 그 가치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발표해 비판적 논박을 주고받는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확인된 자기 가치를 실제로 실현해 보는 일련의 실천을 기획해서 실행한 후, 그 내용을 스스로 기록해 50쪽가량 책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수업은 스스로 저자가 됨으로써 ..
[풍월당 문학강의] 어떻게 이 부조리한 생을 사랑할 것인가 3 ― 사르트르의 『구토』 한 작품마다 특별히 사랑하는 구절이나 장면이 있습니다. 작품의 전체 맥락이나 주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구토』의 경우에는 로캉탱이 오랜만에 온 안니의 편지를 읽은 후에 하는 짧은 회상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던 동안, 우리의 가장 짧은 순간도, 또 가장 작은 걱정거리도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우리의 뒤에 남는 것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다. 소리, 냄새, 그날의 기분,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는 생각까지도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안고 살았으며, 모든 것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현재로서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추억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늘도 없고, 후퇴도 없고, 피할 곳도 없는..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이번에는 다가올 휴가철을 맞아서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최고의 여행은 카타바시스, 즉 저승여행입니다. 살아서 죽음을 겪는 것, 산고를 겪고 여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조금 보충했습니다. 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소년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떠났다. 숙부네 집에 얹혀살면서 인쇄 견습공 일을 하던 소년은 열여섯 살 때 처음 여행을 한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오는데 성문이 닫혀 있었을 뿐이다.“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야훼의 명령을 받고 기꺼이 집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어떤 운명을 느낀 소년은 숙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대로 몸을 돌려 길을 떠난다. 며칠 동안 제네바 성 주변..
인공지능시대의 교육에서 손노동이 중요한 진화생물학적 이유 인공지능시대의 교육에서 손노동이 중요한 진화생물학적 이유 어제 서울국제도서전 컨퍼런스에서 안찬수 선배의 지론인 책읽기와 손노동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을 기회가 드디어 있었다. 인공지능 시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미래의 삶을 위한 기술을 전수하는 것, 즉 책읽기(스스로 문제를 내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와 손노동(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 즉 몸으로 익히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을 먹고 쉬는 사이, 강석기 선생의 『과학의 위안』(엠아이디, 2017)을 읽다가 「석기의 재조명」이라는 글을 만났다. 도구의 사용은 불의 사용이나 사회적 뇌보다 인류 진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 디르티히 스타우트 교수에 따르면, 보기와는 달리 실제로..
생각 좀 하고 살아 《매일경제》 칼럼, 이번에는 ‘생각하기’를 다루었습니다. 본래 글을 조금 보충했습니다. 전 6.5매에 아직 적응할 수가 없네요.ㅜㅜ사람들은 흔히 정보를 생각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오히려 정보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2020년부터 일본은 대입시험을 개혁하면서, 학력과 생각하는 힘 중에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후, 교육 개혁 방향은 교과서를 폐지하고 일제 고사를 없애는 쪽으로 갈 가망성이 높습니다. 교과서와 일제 고사는 생각하는 힘에 역행하니까요. 그렇다면 생각하는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그 이전에 생각이란 게 무엇인지 좀 살펴보았습니다. 생각 좀 하고 살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파스칼의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엔 조리가 없다. 만약 이 말이 진실..
‘질문의 엘리트’가 필요한 시대 《서울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인공지능시대는 미래 인재의 모습을 급속히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질문의 엘리트’가 필요한 시대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못 들어봤다. 영미권에서 쓰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어디 산속에서 살다 온 철없는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세계는 평평하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등의 저서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전도사’를 자부해 온 사람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 인식이 있다. 우리가 ‘마법의 주문’에 홀려서 호들갑을 떠는 사이, 세계는 정보기술이 가져온 격변을 자기 시각에서 수용하고 소화하고 있다.‘제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면 실제로 세..
[21세기 고전]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문학동네, 2009) 지하철역을 놓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책을 손에 잡은 탓이다. 허둥거리며 약속 장소로 뛰는데, 뒤가 궁금하면서 길 한쪽에 주저앉아 또 읽고 싶다. 처음 접하는 작품도 아닌데, 아무튼 이 지경이다. 이것이 공선옥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다. 조금도 편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음의 장벽을 넘어온 문장들이 잔상을 남기면서 시선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잡아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갔다. 제재소 마당에 유일하게 서 있는 목련나무 고목의 꽃망울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봄날 저녁, 그늘이 포근히 내리고 있었다. 그 마당으로 환이 나왔다. 환이 나오자 어두운 마당이..
한 걸음 앞으로, 영원한 혁명을 향하여 ― 사사키 아타루의『제자리걸음을 멈추고』를 읽다 지난 한 달, 사사키 아타루의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를 틈을 내서 두 번 읽었다. 마음에 드는 책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끌리는 책은 “마지막 장까지 읽자마자 서두로 되돌아가서 한 구절을 읽는” 식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으니까. 이 영감 넘치는 책에 대한 작은 글을 적어 아래에 옮겨 둔다. 한 걸음 앞으로, 혁명을 향하여사사키 아타루,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를 읽고 여러분, 소리 높여 말하세요.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있어야 할 대학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좋은 교양주의이며 연구와 교육의 일치다, 즉 전공만이 아니라 전 인격을 도야하는 지(知)의 집단적 행위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학의 자치이고..